"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김제지역 친일파·친일잔재 다수 존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김제지역 친일파·친일잔재 다수 존재
  • 임현철 기자
  • 승인 2021.01.1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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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산학협력단,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 결과보고서 발간
김제 지역 친일파 강동희·곽진근·최복수·최탁 등 4명
종신리 이시카와 농장 가옥 등 유·무형의 친일잔재도 8건 달해
전북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최근 발간한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민족문제연구소전북지부 제공
전북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최근 발간한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민족문제연구소전북지부 제공

일제강점기 김제지역의 친일파(반민족행위자)와 친일의 잔재가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파는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각호 친일반민족행위의 정의 규정에 상당한 행위를 저지른 자(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을사늑약’ 전후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 상층부, 죄적이 현저한 친일행위자(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이다.

16일 전북대학교 산학협력단의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김제지역의 친일파는 강동희(姜東曦 1886~1964), 곽진근(郭塡根 1897~ 1941), 최복수(崔福洙 1922~1950), 최탁(崔卓 1892~?) 등 4명이다.

강동희는 1886년 10월 8일 김제에서 태어나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익혔고, 1908년 전라북도 전주공립보통학교 특별보습과를 졸업했다. 1909년 7월 전라북도관찰도 무장군 주사로 취직하여, 일제강점 이후에도 계속 근무했다.

1911년 9월, 전라북도 진산군 서기로 옮겨 근무하다가 1912년 1월 사직했다. 이해 8월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2월에 전라북도 만경군 서기로 임명되었고, 1914년부터 1920년 4월에 사직할 때까지 전라북도 김제군 서기로 재직했다. 1920년 12월 전라북도 도평의회원(김제)에 임명되었다. 전라북도 김제 지역은 식민지 지주제가 발달한 곳으로 일본인 농장이 중심이 된 농촌 지배체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강동희는 김제 지역의 대표적 지주로서 일본인 대농장 지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일제의 식민지 농정을 수행하는 데 앞장섰다. 1924년에 설립된 만경금융조합의 감사와 조합장을 지냈다. 만경금융조합은 일본인 대농장이 밀집한 지역에서 조직되었는데 조합원은 대부분 농장의 소작인이었고,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의 목적에 맞춰 금융조합 활동을 잘 수행하여 1935년 전선(全鮮)금융조합대회에서 우량조합으로 선정되었다.

1925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아베(阿部)농장 등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확보하려는 일본인 대지주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동진수리조합의 창립위원과 실행위원, 창립상설위원, 평의원을 역임하는 등 수리조합의 설립과 운영에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 동진수리조합은 산미증식계획의 하나로 설립된 당시 최대의 수리조합이었다.

이외에도 김제군축산동업조합 부장, 김제어업조합 조합장, 김제군농회 통상의원, 김제농사조합 이사, 만경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전라북도유도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33년 5월 전라북도 도회의원(김제)으로 선출되었고, 1937년 5월에 재선했다. 1939년 6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1942년 6월까지 재임했다.

일본의 조선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의 성과를 인정받아 1940년 11월 기원2600년축전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되어 참석하고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9월 전시체제 하에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민간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의 김제 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1964년 7월 12일에 사망했다.

곽진근은 1897년에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이사장·장로교목사를 지냈다.

1909년 만경보통학교를, 1913년 전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평양신학교를 제17회로 졸업했다. 같은 해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전라북도 삼례교회를 담임했다. 1925년 김제 원평교회를 담임하면서 전북노회장에 선임됐다.

1929년부터 전주 완주교회를 담임했고, 1931년 노회 회의록 서기를 맡았다. 1937년부터 정읍군 신태인읍교회와 화호교회를 담임하면서 장로회 총회 서기로 2년간 활동했다. 1939년 전북노회장에 다시 선출되었고, 같은 해 9월 노회장으로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이사를 겸했다. 같은 해 10월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지맹을 결성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0년 9월 장로회 총회 최연소 총회장에 선임됐다.

같은 해 10월 20일을 애국주일로 정하고 전국 소속 교회에 실행하도록 했다. 1940년 12월 ‘전선(全鮮)장로회신도대회' 를 경성부민회관과 신문내교회(새문안교회)에서 열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으로 개편해 이사장을 맡았다.

1941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지시로 각 노회장과 각 교회 애국반장 앞으로 '계불(禊祓)의 점진적 보급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여 신도의식(神道儀式)인 미소기하라이(禊祓)를 장려했다. 같은 해 4월 29일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신도대회’을 열고, 총회연맹 여자부를 결성하게 했다.

이 모임에서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신체제 운동과 총후에 처한 기독교인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신체제 운동의 근본 정신, 총력운동의 근본 정신, 고도국방국가의 필요성, 기독교인의 각오”에 대해서 강조했고, 이 연설문은 2회에 걸쳐서 《장로회보》에 연재되었다. 1941년 8월 장로회 총회 상치위원회를 열어 신도들에게서 특별헌금 15만 원 정도를 걷어 '애국군용비행기 헌납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임전보국단의 전라북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31일 각 노회 대표 72명이 '부여신궁조영근로봉사' 를 하도록 했다. 1941년 11월 장로회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12월 13일 사망했다.

최복수(일본군 중위)는 1922년 10월 17일 태어났다.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다. 전주의 전북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카나가와(神奈川)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42년 4월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입학해 1943년 12월 졸업했다.

1944년 5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45년 6월 제58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 견습사관을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중위로 나남 73연대에서 복무했다. 해방 후 전북경찰학교 교관과 전북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 특임 7기로 임관했고, 총사령부 공병처(工兵處)·정보처 보좌관, 육군정보학교 부교장을 역임했다.

육군 대령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6월 29일 김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최탁(이사관·경시·펑톈주재 일본총영사관 부영사)은 1892년 9월 17일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최탁(崔鐸)인데, 1927년 무렵에 최탁(崔卓)으로 개명했다. 전라북도 신명(明)학교를 졸업했고 1916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했다.

1916년 10월 충청남도 서산군 서기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918년 5월 조선총독부 경부로 임명되어 그 해 8월에 경성경관훈련소를 수료했다. 1918년 8월부터 전라남도 목포경찰서 경부(사법주임)를 지내다 1919년 2월 퇴직했다.

퇴직 후인 1920년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원으로 근무했다. 1921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속으로 임명되어 검열업무를 담당했으며 1926년에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속으로 전임했다. 1922년 4월 국민협회(國民協會) 평의원을 지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1년

12월 함경남도 경시(고등관 8등)로 진급해 함경남도 순사교습소장을 겸했으며, 1932년 1월부터 함경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시도 겸했다. 1933년 3월 함경남도 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으로 활동하고, 이 해 6월부터 함경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보안과장)를 지냈다.

1935년 7월부터 함경남도 임시국세조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36년 5월 만주국 펑톈(奉天) 주재일본총영사관 부영사(副領事: 고등관 6등)로 발탁되었으며 12월에 만주국 협화회(協和會) 펑톈조선인청년단 강사를 지냈다. 만주국 협화회는 1932년 7월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 아래 ‘민족협화(民族協和)’의 기치를 내걸고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교화적·정치적 실천단체'를 표방하며 만들어졌다.

각지에 분회를 조직해 만주국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항일운동에 대한 내부교란과 파괴공작, 선전선무공작을 수행하는 한편 전시동원조직의 역할을 담당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재만 조선인에 대한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에 관한 전시(戰時) 업무를 적극 수행하는 동시에 일제침략을 옹호하는 선전 전단, 팸플릿 등을 사비로 대량 인쇄·배포했다.

1937년 9월호 《재만조선인통신》에 중일전쟁 개전을 축하하는 한시 〈황군의 대첩을 듣고 감격함〉(聞皇軍之大捷而感)을 기고했다. “중국과 일본은 역사상 가깝건만 흉악한 무리들이 각축전을 펼치고 / 주려죽은 시체 구덩이에 뒹구는데 이서(吏胥)는 가렴주구(苛斂誅求) 일삼네 / 우리의 성명(聖明)하신 천자 그 정상을 듣고 차마 견디지 못하시고 / 선무(宣撫)하셔도 끝내 효험 없자 출병하여 북정(北征)하라 명하셨네 / 신기한 무공이 천지를 놀라게 하고 황군의 위용이 귀신을 울리니 / 하루아침에 (적군을) 쓸어버려 온 세상이 고루 인덕에 무젖었네(中洲近日史 群凶逐鹿遊 餓莩轉丘壑 吏胥事誅求 有我聖天子 不忍聞其情 宣撫終無效 出師命北征 神武驚天地 皇威泣鬼神 早晩掃蕩日四海霑仁).” 그해 12월 만주국 협화회 싼장성(三江省) 특별공작부장 김동한(金東漢)이 항일무장부대와 전투 중 사망하자 “정말 군(君)의 꽃 같은 전사(戰死)는 신하로서 충성스럽고, 자식으로서 효도를 다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군의 공적과 피는 청사에 빛나며 영원히 후진 조선계(朝鮮系)를 위하여 영예롭고, 불멸의 귀감이 될 것”이라는 추모 조사(弔詞)를 발표했다.

1938년 2월 만주 펑톈방송국에서 일제의 지원병제 실시에 대해 ‘조선 청년의 각오를 다진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연설을 했다. “지금 우리 조선인도 당당한 일본제국의 신민이며, 예전부터의 만고무류(萬古無類)의 국체를 받들고 있다.

또한 민중 자체에 숙명적인 황도 일본 정신을 충분히 체득하도록 모두의 소질을 갖추고 있는 이상,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에 의해 국민적 도야(陶冶)를 가하여 전체 일본 국민으로서 동아건설의 지도민족으로 대국민으로서 광명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은 머지않은 장래에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나는 확신에 차 있다. 즉, 이것은 건국 이래의 대국시(大國是)로 일본 국민으로서의 대사명을 가지는 것이다.

청년 제군이여! 자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시기다. 또 자신의 장점도 알게 될 수 있게 하라.” 1938년 4월 펑톈신사(奉天神社)에서 조선인지원병제도 및 조선인신교육령 실시 축하 봉고제(奉告際)를 열고 펑텐축하대회 총대신(奉天祝賀大會 總大臣) 자격으로 “황은(皇恩)에 대하여 오직 송구스럽고 감격하며 신들은 우리 조국(華國) 정신에 기초하여 일성봉공(一誠奉公) 황국의 사명 달성에 매진하고 이로써 황은에 보답할 것을 맹세한다.”는 봉고문(奉告文)을 바쳤다.

이밖에도 《재만조선인통신》 1937년 1월호에 일본총영사관 부영사로 재직한 소회를 담은 한시 〈축신년(祝新年)〉과 신년 연두사(年頭辭) <적자생활을 청산하자〉, 9월호에 <아제국(我帝國)의 동양에 있어서의 사명과 우리의 진력할 천분(天分)〉, 1938년 1월호에 한시 〈신춘우회(新春寓懷)〉와 연두사 〈순시적(瞬時的) 환경에 희노애락은 금물〉, 10월호에 〈재만조선인의 당면문제-지도자의 재교육이 필요〉 등 많은 친일 글과 친일 시를 기고했다.

1939년 1월 펑톈일본총영사관이 폐쇄되면서 국내로 돌아와 고등관 5등의 경기도 연천군수로 복귀했다. 같은 해2월 종6위에 서위되었으며, 국민총력연맹 연천군연맹 이사장과 재향군인회 연천군분회 상담역, 연천군 지원병후원회 고문 등을 맡았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전쟁 시국에 대한 협력과 조선 민중에 대한 강력한 통제 및 총후활동의 제반 문제를 처리한다는 목적하에 조직된 전시 최대의 관변 통제기구이다. 이 해 7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9월에는 경기도 연천군 지주보국회(地主報國會) 임원에, 12월에는 연천군 유도회(儒道會)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일어 상용(日語常用)이라는 식민정책을 적극 수행하면서 ‘국어상용선서탑(國語常用宣誓塔)'을 건립했다. 연천군수로 재직하면서 중일전쟁과 관련한 출정군인 및 유가족 위문, 국방헌금과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군수물자 공출과 조달 등의 전시(戰時)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이러한 공으로 1940년 4월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을 받았다.

1942년 6월 경기도 고양군수로 옮겼다. 1943년 6월 고등관 4등의 경성부 이사관으로 부임해 경성부 서대문구 구장에 임명되었으며,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부연맹 이사를 겸했다. 같은달 야마모토(山本) 원수의 국장(國葬)에 즈음해 유림대표 이경식(李敬植)과 함께 각 지역 유림회의 문묘제기(文廟祭器)를 모아 해군 무관부에 헌납했다. 해방 후, 종로구 구청장에 임명되었으나 1945년 11월 사임했다. 1949년 4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고, 8월에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또한 김제지역의 친일잔재(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탈과 식민지배 과정에서 남겨놓은 유·무형의 모든 유산)도 곳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제 양석냉굴(금구면 오봉리 106-1)과 김제 봉림냉굴(금구면 오봉리 322),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신풍동 13-53), 김제 죽산리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죽산면 죽산리 570-20), 김제 종신리 이시카와농장 가옥(죽산면 종신리 72-1),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백구면 월봉리 624-2), 김제 죽산보 수문(죽산면 죽산리 646-1), 구마모토 공덕비(죽산면 홍산리 212 아리랑마을 주재소 앞) 등이다.

이 가운데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과 김제 종신리 이시카와 농장 가옥, 김제 죽산보 수문은 유제 처리와 안내문 설치 대상으로 지적됐다.

또한 김제 죽산리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와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은 시설 재활용 대상 식민지 유제로, 김제 양석냉굴과 봉림냉굴은 공간 재활용 대상 식민지 유제로 남아 있다./임현철 기자(limgija@)

김제시 금구면에 있는 양석냉굴./민족문제연구소전북지부 제공
김제시 금구면에 있는 양석냉굴./민족문제연구소전북지부 제공

김제 양석냉굴

김제시 금구면은 1900년대 초부터 금을 채굴하는 광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해당 지역에는 1902년부터 채굴을 시작한 금구광산, 1913년부터 일본인들이 채굴을 시작한 선암광산, 금평광산 등이 있었다. 금광은 1940년대까지 운영됐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개전과 함께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무역 대금 지불수단으로써 금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서, 1942년 「금광업 및 석광업 정리에 관한 건」 제1차 각의결정, 1943년 「금광업 정비에 관한 방침요지」 등을 포함한 「금산정비령」으로 인하여 폐광됐다. 폐광 이후 방치되던 중, 2000년대에 들어서 마을주민들이 이곳을 냉굴로 개발해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양석냉굴은 일제시기 당시, 일본에 의한 한반도의 지하자원 수탈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김제시 굼구면에 있는 봉림냉굴/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시 굼구면에 있는 봉림냉굴/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봉림냉굴

김제시 금구면은 1900년대 초부터 금을 채굴하는 광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해당 지역에는 1902년부터 채굴을 시작한 금구광산, 1913년부터 일본인들이 채굴을 시작한 선암광산, 금평광산 등이 있었다. 금광은 1940년대까지 운영됐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개전과 함께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무역대금 지불수단으로써 금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서, 1942년 「금광업 및 석광업 정리에 관한 건」 제1차 각의결정, 1943년 「금광업 정비에 관한 방침요지」 등을 포함한 「금산정비령」으로 인하여 폐광됐다. 폐광 이후 방치되던 중, 2000년대에 들어서 마을주민들이 이곳을 냉굴로 개발해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봉림냉굴은 일제시기 당시, 일본에 의한 한반도의 지하자원 수탈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볼수 있다.

김제 죽산리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김제 죽산리 구 일본인 농장 사무소)/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죽산리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김제 죽산리 구 일본인 농장 사무소)/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죽산리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죽산리 구 일본인 농장 사무소)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으로 알려진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소이다. 사무소 옆에는 가정집으로 보이는 집이 있으며 뒤쪽에 하시모토의 공덕을 칭송하는 “교본앙옹 송덕기념비(橋本央翁頌德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지붕 속상량문에 대정 15년(1926) 9월 20일로 적혀있어 건물의 준공 시기를 알 수 있다. 하시모토 나카바는 구마모토 웅진현 사람으로 군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군산에서 무역업 등을 하면서 김제군 죽산면의 농경지를 매수하기 시작했다. 그가 김제로 온 것은 1916년으로 농장 부근에 수리사업을 일으킬 계획을 세워, 동진수리조합의 창립위원이자 상설위원이 됐다. 동진강 일대를 개간해 서포리를 중심으로 농장을 경영했으며, 1931년에는 자본금 50만원의 법인주식회사 하시모토농장을 설립한다. 이 건물은 광복후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사용됐다.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신풍동 아리따 설계가옥)/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신풍동 아리따 설계가옥)/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신풍동 아리따 설계가옥)

김제 지역의 일본인 농장을 관리했던 관리인의 집이다. 일제감정기에 일본인들은 김제에 들어와 여러 농장들을 경영했는데, 농장에 소속된 관리인을 위한 주택이다. 이 집은 아리따(有田)라는 일본인이 설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이 집은 일본인 농장 관리인의 삶을 짐작케 한다.

김제 종신리 이시카와 농장 가옥(김제 종신리 한·일 절충식 가옥)/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종신리 이시카와 농장 가옥(김제 종신리 한·일 절충식 가옥)/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종신리 이시카와 농장 가옥(종신리 한·일 절충식 가옥)

1936년경 지어진 이시카와(石川)농장에 소속된 주택이다. 목조 2층 건물로 이 가옥은 농장과 떨어져 있는데, 이시카와 농장에서 일하던 관리인이 살았을 것이다. 이시카와(石川) 농장은 1926년 기준으로 전라북도 내 1,00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농장 중 하나이다. 이시카와(石川) 농장주는 석천현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설립된 석천현농업주식회사(石川縣農業株式會社)이다. 조선 내 지주제 농장 경영 및 농업척식사업 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이 회사는 운영 초기부터 전북 김제군 일대에 1000정보가 넘는 경작지를 확보했고 1920년대 말에는 1700정보 대의 경작지를 운영하는 소작제 회사지주로 성장했다. 김제지역의 토지를 소유한 이 회사의 본사는 현재 김제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김제 지역의 일본인 농장에서 지은 주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 (부용금융조합)/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 (부용금융조합)/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 (부용금융조합)

일본인들의 경제 수탈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건립된 백구면에 소재한 소규모 금융조합 건물이다. 이 시설은 일제의 식민지 사업 추진에 따라 일반농민을 조합원으로 가입시켜 농촌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 공급을 목적으로 한다는 미명하에 김제, 부안 등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됐다. 예금과 대부업무를 취급했는데 실상은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행한 자체적인 농촌수탈 기구였다. 김제에서 생산된 쌀을 반출하면서 농민착취에 선봉적 역할을 했던 이곳은 해방 후 1956년 농업은행으로 사용됐다.

이후 백구 농업협동조합이 자리하기도 했으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건물은 방치돼 있는 상태이다.

김제시 죽산면에 있는 죽산보 수문/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시 죽산면에 있는 죽산보 수문/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김제 죽산보 수문

일본인 지주들이 계를 조직해 세운 보이다. 1919년 하시모토 등 일본인지주들은 죽산계를 조직해 죽산지류 인근 지역의 관개에 사용하기 위해 1921년에 보를 완성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진강 죽산지류인 원평천에 축조된 죽산보의 일부로, 소류지에 설치된 죽산보의 취수문에 해당한다. 해당 흔적은 구 죽산교 부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준공일과 공사관계자 이름이 새겨진 마모된 석판이 붙어 있다. 본래 서해로 흘러가는 원평천의 물길은 하원리 방향으로 흘렀었는데, 조선총독부가 동진강 개수공사의 일환으로 1937년 원평천의 물길을 바꿨다. 하원리 부근에서 동진강과 합류하던 원평천은 해창을 거쳐 서해로 흘러가게 됐고 조선총독부는 1940년 하구인근에 해창방조수문(해창갑문)을 세웠다. 이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죽산보는 식민지 유제로 남게 됐다./임현철 기자(limgi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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